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레이저 보고서 (문단 편집) == 상세 정보 == 프레이저 위원회의 청문회에는 당시 미국에 망명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출석해서 [[박정희 정권]]의 치부에 관한 여러 가지 증언을 하였다. 1977년 11월 29일에 위원회가 작성한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단순히 당시 한국의 경제 정책에 관한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니라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지, 어떤 정책을 쓰고 있는지 등 박정희 정권의 모든 것이 담긴 보고서라서 미 의회에서 파장이 컸다. 총 447쪽의 분량으로, 내용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위조직인 중앙정보부를 통해 정권에 유리하도록 음지와 양지 양면에서 미국 사회를 조종하려고 했다'''는 내용과 '''이걸 위한 수단인 박정희의 비자금과 비자금 조성방법'''에 관한 내용이 있다. 보고서에는 남한 측에서 [[백악관]] 내부에 정보망을 심고 미국 의회 및 뉴스, 성직자, 교육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계획을 획책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의 [[문선명]]에 관한 내용, '''[[중앙정보부]](중정)가 통일교 신도들을 미국 의회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취직시켜 통일교를 미국 내 정치공작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한 정황, 중정과 통일교가 ‘한국문화자유재단’(Korean Cultural Freedom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조직해 남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수단으로 써먹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https://news.google.com/newspapers?id=uqsSAAAAIBAJ&sjid=AvkDAAAAIBAJ&pg=6765,3408302&dq=fraiser+committee+unification&hl=en|참고]].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한국에 해 온 방식을 배워 한국 정부가 미국에 써먹으려 했다는 말.[* [[미국 유대인|유대계]]나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아르메니아계]] 등 본국의 국력에 비해 미국 정계에서 입김이 센 민족들은 이런 식으로 정치세력화되었다. 주변국들에 비해 국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서는 강대국인 미국에 침투하여 미국의 정책을 자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접근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순수한 한국의 국익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사익을 위해서 이루어졌던 부분이 문제일 뿐.] 또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통일교가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는 활동을 편 것과 중정이 관계가 있는지의 여부도 조사했으며 중정이 정치적 목적의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미국의 대학교에 돈을 뿌리려는 계획을 세웠고 재미 한국인들에게 남한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협박한 사실을 폭로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서술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 정부는 이것을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무시했으며 국내에서 보고서 내용이 보도되지 않도록 통제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에서 비밀유지기한이 지나 비밀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고서에는 '''(70년대 들어 수립된) 3차/4차 경제개발계획은 미국의 자문이 없었으며, [[원조|원조금]](AID)의 공헌도 미약했다'''고 기술하였다.(The Korean Government formulated its Third and Fourth Five-Year Plans with virtually no U.S. advisory assistance, and the AID contribution to the implementation of these plans was minor, 181페이지) 실제로 [[포항제철소]]의 건설만 해도 미국이 반대하였다.[* [[1988 서울 올림픽]] 이전까지 미국 정부가 한국이란 나라를 높이 평가한 시기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한국군|한국군 월남 파병]]의 도움을 받았을 때뿐이었을 것이다. 특히 60년대에 미국 정부는 한국을 [[일본]]의 한참 아래, [[필리핀]] 언저리 정도로 놓고 세계 운영을 하려 했고 한국은 일본과 동등해지기 위해 악을 쓰고 대드는 식이었다. 미국은 1차 경제개발계획 때 원조자금으로 짓는 화학공장 건설때도 한국에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낮게 보고 딴죽을 잘 걸었다. 그 때 한국에서는 미국을 대놓고 비토했다가는 예산이 안 나오니까 슬쩍 핵심시설의 용량만 키워 짓고 나중에 큰 공사 없이 주변 시설을 키워 전체 생산량을 늘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런 내막을 모르는 일부 학자들은 100%가 넘는 가동률 기록을 보고 무리했다거나 허위라거나 하는 식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민문연의 동영상에서 언급된 미국 만능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있는 대부분의 문서는 사실 프레이저 보고서가 아닌 여러 가지 단편적인 외교문서다. 보고서에서 간접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미국이 좀 더 주도(사실 장면 정부 때부터 개입)했으나 이어지는 경제계획 수립에 자문(그 마저도 3차/4차는 자문도 없었다.)을 넘어서는 역할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은 1961년 한 해에만 2.61억 달러 가량을 한국에 투자하였다.(프레이저 보고서 163쪽 참조.) 총계 2.61억 중 재정지원 1.76억이고 다른 지원들이 포함된 추산금액이다. 2.61억 달러를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http://www.ytn.co.kr/_pn/0422_201102020143252344|달러당 1,300환]])3,393억환에 해당한다. 1961년 한국의 정부예산은 5,050억환으로 한 해 '''국가예산의 2/3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 금액은 2011년 기준으로 43억달러에 해당([[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309731|근거]])하며 한화로 환산하면 4.8조원에 달한다. 물론 이들의 지원은 한국의 공산화를 우려한 데서 시작되었다. 또 수출주도전략에 있어 미 AID가 조언한 개혁의 조치가 유효하게 작용했다는 언급이 존재한다. >With the concurrence of AID, Park concluded that an import substitution strategy was not in Korea’s long-term interests. Economic success could be better achieved by pursuing an export-led economy based on labor-intensive industries which would use the substantial numbers of unemployed and underemployed workers. This strategy, along with the implementation of some AID-inspired reforms, led to a more than doubling of export earnings—to about $80 million—and a 17.7 percent increase in domestic revenues in the period 1961 to 1963. >----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pur1.32754077064610;view=1up;seq=175|161~2 페이지 일부 참조 발췌]] AID의 동의로 박정희는 수입 대체 전략이 한국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제적 성공은 고용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하는 노동 집약적인 산업에 기반을 둔 수출 주도 경제를 추구함으로써 더 잘 달성될 수 있었다. 이 전략은 AID에서 영감을 받은 개혁의 시행과 함께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수출 수익의 2배 이상 - 약 8천만 달러로 - 국내 수익의 17.7% 증가를 이끌었다. 그리고 프레이저 보고서는 '''[...이러한 놀라운 성과는 최우선적으로 교육받고 근면한 한국의 국민들 때문이었으며, 이는 한국이 가진 훌륭한 국가적 자산이다. 한국 정부는 단호한 결의로 경제를 지도해 경제성장을 이끈 공로가 있다.]'''고 한국의 성과를 치하하는 한편 >A number of factors contributed to this remarkable achievement. Foremost were the Korean people themselves: Educated, industrious, disciplined; they were Korea's greatest natural resource. The Korean Government deserved credit for having placed a priority on economic growth and directing the economy with firm resolve. >----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pur1.32754077064610;view=1up;seq=219|205 페이지 일부 참조 발췌]] '''[1960년대의 미국 정부의 한국 성장에 대한 기여 역시 매우 지대하였으며, 미국의 경제적 지도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기여하였다.]'''고 보고서의 경제 분석 파트의 결론 편에 서술되어 있다. >The role of the U.S. Government was significant, too. In the 1960’s, economic assistance was the major source of funding for industrialization, and both economic and military assistance freed Korea from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defense burden. At the same time, AID officials were integrally involved in Korea’s economic planning, helping to formulate projects and programs and urging necessary and unpopular institutional reforms. U.S. training of Korean economic and administrative officials also contributed to the success. >---- >[[https://babel.hathitrust.org/cgi/pt?id=pur1.32754077064610;view=1up;seq=220|205~7 페이지 일부 참조 발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